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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대를 바꿀 수 있는 가장 좋은 과정 "경청" 「불편한 편의점」 233p (구로 독서 마라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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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0건 조회 7회 작성일 25-06-10 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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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작은거인 입니다
초복 이었다고 하는데 힘나는 음식 들 드셨나요? 저는 삼계탕 먹었습니다!

이번에는 주말 동안 읽은 내용을 한번에 정리해서 가져왔습니다
읽고나면 마음에 잔잔한 여운이 남는 책 「불편한 편의점」 입니다

편의점에 들어오는 손님은 계산대의 점원이 자신을 살피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생각보다 많은 손님들이 물건을 훔친다. 특히 선숙같이 뚱뚱하고 둔해 보이는 아줌마가 있을 때는 훔치는 쪽도 방심하는 편이다. 선숙은 오랜 접객업 경험을 통해 무언가 불순해 보이는 손님을 매우 잘 포착했고, 방금 전 들어오는 소년이 '작정하고' 삼각김밥 두 개를 훔치는 걸 포착할 수 있었다. 그 짧은 순간에 그녀는 이 소년을 어떻게 처리할지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다. 고작 삼각김밥 두 개에 칼이라도 지니고 있을지 모를 불량 청소년과 맞설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앞섰지만, 누구에게도 만만히 보이는 걸 싫어하는 그녀의 깐깐한 성격이 빠르게 치고 나왔다. "내놔. 훔친 거" 선숙이 눈을 똑바로 뜨고 소년을 노려봤다. 소년은 어찌할 바를 모른 채 굳어 있었다. 소년이 한숨 같은 욕설을 내뱉으며 점퍼 안으로 손을 넣었다. 소년이 삼각김밥을 꺼내 계산대에 내려놓았다. 그런데 한 개다. 선숙은 어림없다는 표정으로 소년에게 턱짓을 했다. "다 꺼내. 경찰서 끌고 가기 전에. 어서!" 그때였다. 소년이 다시 점퍼에 손을 넣더니 벼락같이 꺼낸 삼각김밥을 그녀의 얼굴에 던졌다. 그녀는 눈앞이 깜깜해진 채 녀석의 팔을 놓쳤다. 소년이 편의점 문을 나서려는 찰나, 밖에서 누군가 소년이 미는 유리문을 곰 같은 덩치로 막아섰다. 독고 씨였다. 소년이 어찌할 바를 모르고 뒷걸음질 쳤다. 독고 씨는 차분하게 들어와 맡겨놓은 물건을 챙기듯 소년을 한 팔로 감싸 안고 선숙 쪽으로 다가왔다. 소년은 속수무책 독고 씨에게 이끌려 계산대 앞으로 끌려왔다. 부아가 치민 선숙이 그에게 따지듯 물었다. "왜? 아는 애예요?" "얜 짜몽이라고... 맨날 팔지도 않는 짜몽을 찾거든요... 나 근무 때 왔는데... 오늘 좀 늦었나 보네요. 짜몽, 너... 오늘 배꼽시계... 고장 난 거야? 아니면... 늦잠 잤어?" 독고 씨는 마치 협력자에게 말하듯 소년에게 물었고 소년은 별말없이 딴전을 피웠다. 독고 씨가 몸을 돌려 소년을 바로 세웠다. 독고 씨는 선숙 옆에 떨어진 삼각김밥 뭉치로 시선을 옮기더니, 곧 몸을 숙여 그것을 들어 보였다. "너... 맞어?" "... 그런데요" "그러면... 안돼" "알아요" 선숙은 독고 씨와 소년의 차분한 대화를 듣고 있자니 더욱 부아가 치밀었다. 당한 사람은 난데 왜 두 사람이 서로 풀고 있냔 말이다! (중략) "계산... 안 끝났잖아요... 이거 던져요" 독고 씨가 턱짓으로 소년을 가리켰다. 이 인간 지금 나보고 녀석이 한 짓을 똑같이 하라는 거야? 선숙은 어이가 없었다. 독고 씨의 진지한 표정도 그랬지만 그 뒤에 선 채 마치 집행을 기다리는 사형수처럼 풀이 죽어 있는 소년을 보자 말문이 막혔다. 선숙은 정신을 차리고 그가 주도하는 흐름을 끊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집어치워요! 내가 애처럼 김밥이나 던질까? 가져가 둘이 처먹든가 버리든가 알아서 해요!" 선숙이 소리를 빽 지르며 쏘아붙였다. 독고 씨가 웃었다. 웃어? 황당해하는 그녀를 향해 독고 씨가 소년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용서... 해주셨어. 늦게라도...사과해" "죄송합니다" 선숙은 더 보기 싫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독고 씨가 마치 아들과 동행한 가장 처럼 소년의 어깨에 팔을 두른 채 편의점을 나섰다. 둘은 야외 테이블로 가 삼각김밥을 사이좋게 까기 시작했다. 피해자는 도둑질을 당하고 김밥으로 얼굴을 강타당한 자신이어야 했다. 하지만 독고 씨가 순식간에 일을 정리해버리는 바람에 제대로 화도 못 내고 말았다. 보통 이런 경우라면 선숙 씨는 부아가 치밀어 주변 곳곳에 불만을 토로하고 분노를 내뿜었을 텐데, 신기하게도 화가 잦아들었고 딱히 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독고 씨와 '짜몽'이 가난한 부자 父子처럼 삼각김밥을 먹는 걸 바라보았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 역시 이 기묘한 소동극의 삼각형 한 변을 차지한 게 이상하게 재미있다고 느껴져서 삼각김밥을 까며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였다. 독고 씨는 그동안 짜몽이란 녀석을 챙겨줬겠지. 그러기에 저 불량한 녀석이 두말 않고 그의 지시를 따르는 것 이고... 선숙 역시 미간이 뻐근하긴 하지만 좀처럼 누굴 봐주는 적이 없는 자신에게 생긴 변화가 신선하게 느껴졌다 . 한마디로 기분이 좋아졌다. 이후 신기하게도 독고 씨와 마주하면 묘한 안도감이 들기 시작했다. 편의점은 비싸다고 구멍가게나 마트만 드나들던 동네 할머니 들이 마실 나오듯 유리문을 열고 들어와 어슬렁대기 시작했다. 할머니들은 편의점 곳곳을 청소 중인 독고 씨의 등판을 두드리며 이것저것 물어댔고, 그는 할머니들을 이끌고 진열대 사이를 오가며 투 플러스 원 혹은 원 플러스 원 상품을 소개해주었다. "이거랑 이거... 하시면 지, 진짜 싸게... 가져가시는 거예요" " 편의점이 마냥 비싼 게 아니라니까. 이 아저씨가 이런 걸 다 알려주니 얼마나 좋아. 우린 눈이 잘 안 보여 이딴 거 못 읽어. 하나 사면 하나 더 준다는 걸 어떻게 알 것이고 어떻게 믿을 것이여?" 독고 씨는 할머니들이 고른 상품을 바구니째 들고 와 선숙 앞에 내려놓으며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그 모습이 마치 나 공 잘 물어왔으니 간식을 달라는 골든 레트리버 를 연상케 했다. 그는 선숙이 계산을 마친 바구니 가득한 상품을 들고 그대로 할머니들과 나갔다 한참 뒤 돌아왔다. 이유를 묻자 할머니들이 들고 가기 무거워 보여 가져다 드리고 왔다는 것이 아닌가! 이 무슨 첨단 배달 시스템 이란 말인가? 선숙은 기가 찼지만 이후 독고 씨의 노인 공경 배달 서비스 덕에 생긴 할머니 단골들이 오전 시간의 매출 을 꽤나 올려주었다. 방학이 되자 할머니들은 돌보고 있는 손자 손녀 를 장바구니처럼 달고 다녔고, 그런 아이들은 또 식음료 코너에서 그녀들의 쌈짓돈을 꺼내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연말을 앞두고 사장 언니는 "시현이가 같은 편의점 체인의 다른 매장으로 스카우트되어 간다"며 업무 시간을 조정하자고 했다. 스카우트라니? 독고 씨는 무료 배달을 하지 않나, 시현은 스카우트가 되지 않나, 참으로 가지가지 하는 편의점 알바생들이 아닐 수 없었다. 선숙은 자신이라도 중심을 잡아야겠다는 생각에, 근무시간을 늘려달라는 사장 언니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평소보다 두 시간 더 일하고 귀가하게 되었다. 새해가 되고 일이 늘어나니 활력을 내려 애썼지만 나이를 한 살 더 먹어서인지 그녀는 금세 피로감을 느꼈다. 집은 집대로 더 엉망이 되어가고 있었다. 선숙이 두 시간 늦게 오게 되자 아들은 혼자 라면을 끓여 먹고 설거지나 뒷정리는 나 몰라라 펼쳐놓기 일쑤였다. 공부 때문이라 생각하기에는 방에서 들리는 게임 소리가 너무 커 그녀의 마음을 참담하게 만들 따름이었다. 선숙은 아들에게 효도나 집안일 분담을 바라는 게 아니었다. 그저 아들이 자기 스스로를 도왔으면 할 뿐 이었다. 아들은 모범생이었던 중고교 시절에 많이 놀지 못한 게 억울 하기라도 했는지 불량 청소년 으로 인생을 다시 살고 싶은 모양이었다. / 내 생각: 부모는 자식을 미래를 위해 공부하라고 했지만, 그건 아들의 의사나 결정이 아닌 부모의 압박 이었을거다. 자신이 원해서 한것이 아니니 숙제나 부담으로 느껴지고, 잘해야 본전이고 못하면 비참 했겠지. 그게 쌓이고 풀어지지 않으니 부모에게 반감 이 생겼을 것이다. 더군다나 부모의 말을 들었으나 결과적으로 잘 되지 않았으니 탓하기 딱 좋았을테고. '부모님 말대로 했지만 풀리는 게 없잖아. 이럴바엔 내가 하고 싶은거 즐기는게 나았어' 같은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항상 생각하지만 하기 어려운 게 이거다. 강제가 아닌 본인 스스로 원해서 하도록 두는것. 부모의 생각이나 필요에 의해 행해지는게 아니라 진심으로 아이가 원하고 즐거워서 할 수 있게 하는것. 아이가 원하는게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수준의 일이 아니라면 부모는 자신의 뜻과 달라도 지켜봐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 기름이 번들대는 얼굴은 찌들어 있었고, 불룩 나온 뱃살은 반바지 위로 튀어나와 있었다. 한겨울에 반바지라니... 집 안에만 틀어박혀 보일러를 빵빵하게 때고 있는 한심한 꼴 이었다. 감색 양복에 단정하게 깎은 헤어스타일로 첫 출근을 하던 대기업 신입 사원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집 밖은 커녕 방 밖에도 안 나오는 천덕꾸러기 신세가 된 것이다. 한심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 을 무시하고 아들은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철컥, 문 잠그는 버튼 소리가 들리자 선숙의 마음 속 어딘가의 버튼도 눌리고야 말았다. 자신을 희번덕거리며, 미친 사람 보듯 했던 아들의 눈빛에 대답하듯 미친 듯이 두드렸다. 눈물이 흘렀고 가슴이 뻐근했지만 함께 고통을 나눌 남편은 없었다. 울다 지쳐 잠든 그녀는 어김없이 일곱 시에 일어났다. 징그럽게도 그 시각까지 아들의 방에선 게임 소음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 차리던 아침밥도 안 해놓고 도망치듯 집을 나섰다. 집과 아들을 버리고 어디론가 사라지고 싶은 심정 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갈 수 있는 곳은 일을 해야 하는 그곳뿐이었다. 출근하니 독고 씨는 새로 진열한 컵라면의 오와 열을 맞추는 데 정신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는 강박증 환자처럼 상품 하나하나 줄을 맞춰 진열하는 데 애를 썼다. 한심한 아들과 참으로 비교되는 행동이었다. 처음으로 아들이 노숙자에서 갓 벗어난 중년 아저씨보다 못하다고 느꼈고, 그러자 스스로가 더 비참해졌다. 선숙은 순간 울음이 터졌다. 독고 씨는 이제 건실한 사회인이 아닌가? 그에 반해 방콕에 게임중독인 아들은 사회에서 이탈한 패배자이고 앞날이 컴컴한 인간이다. 그런 생각이 자꾸 떠올라 그녀는 그대로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독고 씨가 창고 문을 연 채 선숙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독고 씨는 조용히 다가와 선숙에게 손을 내밀었다. 곧 휴지를 한 뭉치 쥔 그의 손이 선숙의 눈앞으로 들어왔다. 선숙은 그가 준 휴지로 눈물과 콧물을 훔쳤다. 그럼에도 속에서 무언가 자꾸 터져 나오는 것 같아 심호흡하듯 숨을 골라야 했다. 갈증이 사라지고 나자 선숙은 스스로를 주체하지 못하고 떠들어댔다. 독고 씨는 기다렸다는 듯 그런 그녀의 말을 경청했다. 카운터에 선 채로 선숙은 눈물을 훔치며 한심한 꼴이 된 아들에 대해 봇물터지듯 털어놓기 시작했고, 마주 선 독고 씨는 고개를 연신 주억거리며 그녀의 울분 섞인 한탄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아들이랑 이야기는... 해봤어요?" "내 말 따위 듣지도 않아요. 진절머리 내고 피하죠. 수없이 붙잡고 얘기했다고요. 그런데 아들은 날 무시하고 이젠 피해요. 그 녀석에게 난 식모 아니면 하숙집 주인이나 다름없다고요!" "아들 말을 먼저... 들어보세요. 지금 보니까 아들이 마, 말을 안 듣는다고만 하는데... 선숙 씨도 아들 말을... 안 듣는 거 같아요. 지금 내 말은 잘 들으시는데... 아들 말도 들어봐요. 왜... 회사를 그만뒀는지... 왜 주식을 했는지... 왜 영화를 했는지... 그런 거 말이에요" "휴... 벌써 3년 전이네요. 회사를 그만둔다고 하길래 노발대발했죠. 그 좋은 대기업을 힘들게 들어가서 왜 그만둔다고 그러냐고. 그렇잖아요?" "왜 그만둔 건지 그래서... 알아요?" "다시 물어봐요. 왜... 그만둔 건지. 뭐... 힘들었는지. 아줌마 아들만이 알잖아요. 아줌마도 아들 일이니까... 알아야 하고요" "들어줬다가는 진짜 그만둘까 봐 윽박지른 거예요. 왜 그만두냐고 물어도 말을 흐리길래 어떻게든 버티라고만 했어요. 근데 그러니까 그냥 질러버리더라고. 지 아빠가 갑자기 가출하던 것처럼 그렇게 말이야" "겁나셨구나. 아들이... 아버지처럼 될까 봐 " 손님이 나가고 독고 씨가 다시 선숙 앞에 와 섰다. 그녀는 이제 좀 진정이 된지라 그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내가 말이 너무 많았죠? 너무 힘들어서...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고... 독고 씨가 들어줘서 좀 풀린 거 같아요. 고마워요" "그거예요. 들어주면 풀려요. 아들 말도 들어줘요. 그러면... 풀릴 거예요. 조금이라도" 그제야 선숙은 자신이 한 번도 아들의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언제나 아들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기만 바랐지, 모범생으로 잘 지내던 아들이 어떤 고민과 곤란함으로 어머니가 깔아놓은 궤도에서 이탈했는지는 듣지 않았다. 언제나 아들의 탈선에 대해 따지기 바빴고, 그 이유 따위는 듣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이거...아들 갖다줘요" 독고 씨가 대뜸 삼각김밥 투 플러스 원 세트를 카운터에 내려놓았다. "아들을요?... 왜?" "짜몽이 그러는데... 게임하면서... 삼각김밥... 먹기 좋대요. 아들 게임할 때... 줘요" 선숙은 말없이 독고 씨가 내려놓은 삼각김밥을 보았다. 아들은 예전부터 삼각김밥을 좋아했다. 선숙이 편의점 일을 시작하자 폐기 삼각김밥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선숙은 삼각김밥을 챙기지 않았다. 아들이 방에 박혀 게임하며 그걸 먹는 꼴이 보기 싫었기 때문이다.

근데 김밥만 주면... 안돼요. 편지 ... 같이 줘요. 아들한테... 그동안 못 들어줬다고, 이제 들어줄 테니 말... 해 달라고 ... 편지 써요. 그리고... 거기에 삼각김밥... 올려놔요

독고 씨가 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세장을 꺼냈다. "내가 사는 거예요. 어서... 찍어요" 선숙은 독고 씨가 시키는 대로 바코드 리더기를 가져갔다. 삑, 소리와 함께 '결제가 완료되었습니다'라는 기계음이 들리자, 그녀의 머릿속을 복잡하게 오가던 불안감이 완료된 기분이었다. 선숙은 자동 반사처럼 삼각김밥 밑에 둘 편지의 내용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원 플러스 원

경만은 마음속으로 그 편의점을 '참새방앗간'이라 부르곤 했다. 참새는 경만 자신이다. 언제부터 그 편의점 야외 테이블이 그의 단골 혼술처 가 됐는지는 그 역시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경만은 매일 자정 전후 5천 원어치 술과 안주로 속을 덥히게 되었다. 뜨거운 국물이 시원하듯 차가운 소주는 따뜻 했고, 편의점에 세팅된 수많은 컵라면과 삼각김밥은 매일 새로운 조합을 만들 수 있기에 결코 지겹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은 카운터에 낯선 사내가 서 있다. 큰 덩치에 위압감 을 주는 눈빛이 이전의 호빵맨 아저씨와 확실히 다르다. "5천... 2백 원...요" 띄엄띄엄 무뚝뚝한 말투 역시 부담스럽다. 경만은 지난주까지 일하던 호빵맨 아저씨에 대해 생각했다. 명퇴 후 편의점 야간 알바를 하는 것처럼 보이던 아저씨는 동그란 얼굴과 시원한 민머리가 돋보였기에 속으로 호빵맨이라 불렀다. 호빵맨 아저씨는 그에게 무척이나 친절했는데, 컵라면을 구입하면 알아서 나무젓가락도 챙겨주고 맛있게 드시라는 인사도 건네곤 했다. 그야말로 생활 전선에서 힘들게 복무 중인 전우로서의 동병상련을 말없이 나누던 순간 이었다. 그렇다면 호빵맨 아저씨 이 한산한 편의점의 밤을 장악한 저 사내는 누구인가? 경만은 추리했다. 무뚝뚝한 태도와 서비스업에 익숙하지 않은 모습, 거만한 듯 졸린 듯 알 수 없는 눈빛으로 술 마시는 경만을 경계하듯 살피는 것까지... 영락없는 사장의 풍모였다. 옳거니. 저 사내는 편의점 장사가 안 되자 호빵맨 아저씨를 자른 것이다. 그런데 대안도 없어 며칠 동네 할머니 라도 고용해봤는데 그것도 영 도움이 안 됐는지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이다. 어쩌면 호빵맨 아저씨의 근무 기간이 1년이 다 되어가니 자른 걸지도 모른다. 1년이 지나면 퇴직금을 줘야 하니까. 경만의 회사 비정규직 직원이 아무리 일을 잘해도 11개월쯤에 잘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 내 생각: 진짜 주인을 '동네 할머니'로 착각한것부터가 직원들과 대화를 많이 해보지 않고 혼자 추측하다 엇나갔다는 증거이다.ㅋㅋㅋ 한편으로 비정규직이 1년을 못채우고 짤리게 되는 얘기가 슬퍼졌다. 내 주변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한 상황이지만, 어디선가 벌어지고 있으니 내 귀에까지, 이 책에서까지 언급되는 거겠지... / 집에 간다고 지옥에서 로그아웃 가능한 것도 아니었다. 과로를 하느라 가정에 충실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돈도 많이 벌어다 줘 대접도 받지 못하는 상황이 반복되자, 아내에게는 존재감 없는 남편으로 쌍둥이에게는 재미없는 아빠로 어떠한 반전도 주지 못한 채 늙어갈 판이었다. 아니다. 회사에서 잘리고 재취업이 힘들어지면 그 자리 마저도 위협받을 것이고 그것이 반전 혹은 새드엔딩으로 마무리되는 그의 인생이 아닐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성실하게 살아온 마흔넷 인생이었다. 애초에 흙수저였고 재주도 별 볼 일 없는 걸 알기에 성실함과 친절함을 무기로 싸워나갔다. 거래처에서 만난 네 살 어린 아내와 결혼하고 쌍둥이를 낳았을 때는 흙수저의 수저 질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 생각했다. 금수저를 지고 태어난 놈들보다 값진 인생이라 자부하던 시절도 있었다는 말이다. 시간은 그 차이를 알려 주었다. 스타트 라인부터 앞선 놈들은 해가 거듭할수록 여유가 생겼고 능력과 돈을 축적 할 수 있었다. 반면 이제 경만은 탄약이 고갈되어 곧 맨몸으로 돌진 해야 하는 참호 속 병사 가는 심정이었다. 유일한 장점이던 성실함과 친절함에 바탕은 체력 이 었고, 나이가 들어가며 딸리는 체력은 성실함과 친절함을 무능력과 비굴함으로 변화시켰다. 체력은 정신력조차 지배에 하게 되어 멘탈이 털리는 날이 늘어났고, 곧 대표와 친구들의 무시 로 돌아왔다 쓰디쓴 상념에 젖어 소주잔을 비우다 보니 술은 이제 반 잔 밖에 남지 않았다. 그렇게 하루에 유일한 자유에서 로그아웃 한 뒤 자리를 정리했다. 다음 날 밤에도 곰 같은 사내는 심드렁하게 선 채로 경만의 음식을 계산했다. 이번엔 나무젓가락을 바로 건네주는게 하루 만에 편의점 일에 적응한 듯했다. 학습능력이 좋은 것이다. 그러니 호빵맨 아저씨와 비슷한 연배 임에도 편의점 사장이 된 거겠지 . 남들 명퇴 하는 나이에 이미 자산을 확보한 그는, 편의점 매장 몇 개 돌리며 가끔 구멍나는 알바 자리나 소일거리로 때우는 느긋한 인생인 것이다. 경만는 부러움과 무력감을 동시에 느끼며 테이블에서 그날의 유일한 낙을 해치웠다. 사내는 여전히 그를 살피고 있었다. 그는 경만을 어떻게 생각하는 걸까? 루저 인생이자 불우한 소시민 가장으로 보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경만는 손님이다. 점주 사내의 시선이 부담스러웠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절대 자기 자리를 뺏기지 않겠다고 다짐을 했다. 그렇게 한달여가 흘렀고 2019년 한해도 마감을 앞두고 있었다. 올해도 승진은 커녕 연봉삭감이나 없으면 다행인 한해였다. 아내는 아이들이 중학교 들어가면 학원을 더 보내야 될 것 같다며 조심스레 말했다. 경만는 여성 배우자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갑갑함이 몰려왔다. 갑갑해 미칠 지경이 되니 이 추운 밤에 야외 테이블에서 먹는 소주만이 그에게 소화제가 되어 주었다. 사내가 경만 앞에 와 자리한게 정확히 언제인지 모르겠다. 피로와 취기에 추위가 겹쳐 웅크리고 있다 보니 까무룩 잠이든 것일까? "아저씨, 이런데서... 주무시면... 얼어 죽어요. 술... 마셔도 추위는... 가시지 않아요" 점주는 띄엄띄엄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자신을 띄엄띄엄 보는 건지 부르주아라 그런 건지 아무튼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잠시 후 사내는 아메리카노 라지 사이즈 종이컵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살펴보니 담황색의 액체에 얼음 두아리 들어있었고 위스키임이 분명했다. "왜? 독이라도 든 건 아닐까?" 경만는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사내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마시라는 듯 턱짓을 하곤 자신의 손에 든 종이컵을 입으로 가져가 한 모금 들이켰다. 양주깨나 마셔 본 여유가 느껴지는 포즈였다. 제약 영업 시절 접대 차 모시고 간 룸살롱에서 양주 폭탄주를 보리차 마시듯 들이켰던 의사이자 교수인 인간들을 보는 기분이었다. 경만도 오기가 생겨 컵을 들었고 단숨에 비웠다. 차가운 액체가 경만에 식도에서 가슴까지 얼려버릴 듯 적셨다. 그런데 양주라면 당연히 치고 올라 와야 할 화끈한 기운은 없고 차가운 한기만 올라왔다. 뭐지? " 대체 이게 뭡니까?" " 옥수수... 수염차입니다. 속상할 땐... 이게 좋아요. 색깔 때문에... 술 먹는 기분도 들고... 속도 풀리고 좋아요" 경만은 이 사람이 괴짜가 아니라면 자기를 놀리는 거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호의로 건넨 음료가 술이 아니었다고 화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도... 매일 마셨어요. 마시니까 맛이 가더라고요. 몸도, 머리도, 그러니까... 옥수수수염차를... 마셔요. 한잔 더... 받아요" "이제 이것만 마셔요. 술... 없이도 살 수 있어요" "나보고 지금 술 끊으라는 건가요? 차라리 나보고 가게 오지 말라고 하세요. 술을 끊어라 말라 당신이 왜 충고질입니까?" " 도와주고 싶어서... 매일 옥수수수염차... 얼음에 타 드릴게. 라면에 김밥에... 이걸 마셔요. 그럼 술 생각 없어질 테니-" " 내가 여기서 혼술 해 가게 영업이라도 방해 했나요? 쓰레기를 남겼어요? 맨날 깨끗이 치우고 갔다고요. 돕긴 뭘 좋아? 그냥 오지 말라고 하시든가!" 그해 연말, 계속된 회식으로 인해 경만은 이틀에 한 번꼴로 취해 귀가했다. 당연히 편의점 혼술 따위 그립지 않았다. 자신이 찾지 않아 더욱 썰렁해진 편의점 야외 테이블을 쌤통 이라는 듯 바라보며 스쳐 지나갔다. 나이를 먹을수록 그의 자존감이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모두 다 회사에서의 굴욕과 집에서의 소외감 때문 이다. 차라리 퇴사하면 회복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지만 집에서의 존재감 없음은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술이 고팠다. 하지만 새해를 맞아 셋 밖에 없는 술 친구 중 둘은 금주를 선언했고 하나는 고향으로 귀농했다. 신년회도 시대 분위기에 맞춰 갔다. 송년회 때 마셨으니 간단히 점심이나 하자는 분위기 였다. 마치 세상이 자신만 따돌리는 것 같았다. 이것이 경만의 피가 알코올을 부르게 만드는 이유였다. 퇴근길에 혼술이 할 수 있는 편의점을 찾아야 했다. 하지만 동네에서 겨울에도 야외 테이블을 치우지 않는 편의점은 그곳뿐이었다. 이상한 백곰이라 그런지 사장은 야간 알바를 구하지 않고 자신이 계속 밤에 편의점을 지키고 있었다. 제길. 사장이면 고용창출이나 할 것이지, 이래서 낙수효과 없는 거라니까, 편의점을 지나치려던 경만의 발이 순간 주춤했다. 웬일인지 편의점 야외 테이블에 참깨라면 컵라면이 놓여 있었다. 그것만이 이 울적한, 변할 것 없는 새해의 자신을 위로해 줄 것 같았다. 경만은 컵라면이 백곰의 연어 낚시용 미끼일지라도 먹어야 했다. 계산을 하며 인사를 던지는 백곰 사장에게 눈으로만 인사한 뒤 경만은 서둘러 밖으로 나왔다. 그때 그가 밖으로 나왔다. 애써 태연하게 굴렸던 경만은 순간 그의 손에 들린 선풍기를 보고 고개가 돌아갔다. 자세히 보니 선풍기가 아니라 열풍기 였다. 어리둥절 한 와중에도 솔솔 불어오는 열풍기의 온기에 경만의 굳은 얼굴이 풀리기 시작했다. " 그동안 안 오셔서... 못 쓸 뻔 했어요. 저거. 여기 애용 하셨잖아요... 근데 추워서 안 오시는 거... 같아서 사 놓은 건데... 암튼 오셔서 다행입니다" 백곰 사내는 열풍기 보다 따뜻한 말을 무뚝뚝하게 내뱉고는 사라졌다. 따뜻했다. 소주도, 그 소주가 담긴 컵도. 새내가 경만을 위해 특별히 마련했다는 온기를 주는 물건도. 경만은 왕따 였지만 이곳에서만큼은 왕따가 아니었다. 이놈의 불편한 편의점이 한 순간에 자신만의 공간으로 돌아왔다. VIP로 컴백한 기분이었다. 순식간에 참참참 해치웠다. 그런데 사장이 마치 값을 치러 한다는 듯 경만 앞에 다시 나타났다. 옥수수수염차를 들고서. 그냥 거래처 갑 대하듯 한잔 받아 마시고 일어나면 그만 아닌가? 사내가 두툼한 곰발바닥 같은 손으로 자신의 얼굴을 문질러댔다. 웬일인지 그 모습이 쓸쓸해 보였고 경만은 삐딱한 태도가 녹기 시작했다. 사진에는 초등학교에 막 입학할 즈음에 쌍둥이 딸이 이를 빛내며 데칼코마니처럼 웃고 있었다. 늦은 귀가로 실물보다 더 자주 보는 딸들의 6년 전 모습이었다. "이런 고운 딸들을 위해서 이렇게... 열심히 일 하시는 거군요" "부모라면 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부모라서... 힘드시죠?" "예. 힘듭니다" 유도 신문인 줄 알면서도 당한 기분이었다. 그런데 마치 둑이 무너진듯, 경만의 입에 모터가 달린 듯, 온갖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곧 중학교에 들어가는 딸들이 자신과는 말도 잘 안 하는 거부터 아내의 구박 아닌 구박, 회사에서 좁아드는 입지와 무시들, 거래처에서의 모멸감까지... 경만은 신들린듯 고해성사 하듯 마구 침을 튀겨가며 사내에게 이야기했다. "술 끊고 옥수수수염 차... 드세요. 아까 아내분이 집에서 술... 금지시키셨다면서요. 옥수수수염차 드시면... 떨지않고 집에서 야식 드실 수 있잖아요. 가,가족과 함께" 꾸벅 인사하고 자리에서 벗어나는 경만의 등에 사내가 꼬리표 붙이듯 읊조렸다. " 술 안 마시면 다음날... 개운하게 하루 시작하고... 회사에서 능률도 올라갑니다" 사내와의 곤란하고 황당한 대화 이후 경만은 백곰의 편의점을 피해 가기 위해 퇴근길 동선을 들려야 했다. 웃기는 건 사내의 편의점을 못 가다 보니 혼술할 곳이 완전히 없어졌다는 점이다. 경만은 술 따위 안 먹고 곧장 귀가 하기로 했다. 경만이 11시 전에 술 냄새 없이 퇴근하자 낯설어 하던 아내와 딸들도 곧 새해 아빠의 금주 다짐을 지지한다며 예상에 없는 응원을 보냈다. 가족들이 오해를 한 거였지만, 어쨌거나 오랜만에 가족들이 응원해주니 기분이 좋았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술도 끊어 보자고 마음 먹었다. 그러자 더 빨리 귀가하고 싶어졌고 혼술 생각도 사라졌다. 퇴근하고 야구 아내와 딸들이 보는 TV 프로를 같이 보자니, 재미있는 프로가 많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연휴가 끝난 지 며칠 되지 않는 늦은 밤의 퇴근길, 경만은 자기도 모르게 그 편의점이 자리한 길로 퇴근하고 있었다. 이제 그 편의점 앞에 지나도 혼술이 당기지 않았고, 그걸 의식하지도 못할 정도로 발걸음이 자연스러워졌다. 야외 테이블 달랑 놓인 옥수수수염차 가 백곰의 존재감을 느끼게 해주었다. 거참, 재밌는 양반이군. 한 달 전 참깨라면 컵라면에 끌려 편의점으로 향했던 것처럼 경만은 이번에도 옥수수수염차에 끌려 편의점으로 발걸음을 틀어야 했다. 어색한 인사후 침묵이 흘렀다. 경만은 그제야 옥수수수염차를 내려놓았다. "얼마죠?" "공짭니다" "왜죠?" "댁 드리려고... 놔 둔거니까요" "그러니까 왜죠?" "전에 말씀드렸듯이... 옥수수수염차 이거 술만큼 중독성 있어... 매일 두개 세개 드시면... 우리 가게 매출에 좋잖아요. 그러니까... 미, 미끼 상품인 거죠" "고맙습니다" " 저거 좀... 사 가지 그러세요" 경만은 사내가 가리키는 쪽을 돌아봤다. 계산대 바로 앞에 놓아 로아커라는 초콜릿이 진열되어 있었다. "청파동에서 제일 고운... 그러니까... 아주 똑같이 고은 아이 둘이... 이거 좋아해요" 사내는 계산을 하며 예의 그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경만은 심장이 두근 거렸다. " 걔들이 이 초콜릿을 엄청 좋아하는데... 언제부턴가 안 사더라구요. 그래서... 내가 물었어요. 너희들 요새 이거... 끊었니? 큰 앤지 작은 앤지 암튼... 그러더라고요. 이제... 원 플러스 원 아니잖아요. 그래서 내가... 떠봤죠. 얘들아, 이거... 어, 얼마 한다고. 엄마한테 사달라고.... 그래. 그러니까 애들이 뭐라고 했는지 아세요? 엄마가... 아빠 힘들게 돈 버니까... 돈 아껴 써야 한다고... 편의점에 가면... 원 플러스 원 만 사라고 ... 그랬다는 거예요. 거참, 정말 알뜰하다 싶었고... 애들이 참 잘 컸다 싶었죠. 어제부로 이 상품 다시... 원 플러스 원 됐으니까, 오늘은 아버지가 사 가시면 되고, 내일부턴 딸들 보고... 사러 오라고 하세요." 경만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다. 사내에게 목례를 한 뒤 지갑을 열어 카드를 집어넣었다. 지갑 속에서 딸들이 원 플러스 원으로 웃고 있었다

불편한 편의점

인생은 해결방도의 연속이다. 오늘 그녀가 해결해야 할 우선 과제는 겨울을 나을 거처를 찾아가는 일. 다행히 거처는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길치인 그녀에게 서울에 오래된 동네 골목을 헤매며 집을 찾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윈터 이즈 커밍! 겨울이 되자 늙은 아이폰은 어김없이 예고도 없는 동절기 파업을 감행했다. 그로 인해 가뜩이나 어려운 길 찾기 난이도가 업그레이드 되었고, 최후의 보루인 전화로 길 묻기조차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알바는 통화를 허락했고 인경은 눈 인사와 함께 서둘러 트렁크를 눕힌 뒤 열었다. 트렁크에서 꺼낸 수첩에 다행히 기록해 둔 번호가 있었다. 인경은 자신의 이름을 밝히고 휴대폰 배터리가 다 되어 편의점에서 연락을 하게 됐다고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 편의점요? 혹시 ALWAYS에 계세요?" 인경이 그렇다고 답하자 그녀는 바로 건너편 빌라 3층 이라며 웃음을 터트렸다. 인경은 지난 가을을 원주 박경리 토지 문화관에서 보냈다. 박경리 선생님이 후배 작가들을 위해 지은 그곳은 문인들과 예술가들에게 집필실과 삼시세끼를 무료로 제공해 주고 있었는데, 큰맘 먹고 입주한 토지문화관에서 그녀는 자신의 작가 생활을 마무리할 계획이었다. 각자가 하나의 행성 과도 같은 작가들 이 서로 조심스레 공전 하며 눈길을 나누는 일상도 신선했다. 어떤 작가들은 점심 식사 후 탁구를 즐겼고, 어떤 작가들은 저녁 식사 후 막걸리를 들고 근처 냇가에 모이곤 했다. 활달한 성격 인경이기에 평소 같았으면 어디에라도 합류했겠지만, 이번에는 홀로 시간을 보내는데 주력하기로 했다. 이곳에서도 글을 쓰지 못한다면 절필을 생각으로 들어가기 때문이다. 입주한지 3주쯤 지났을 때 희수 샘이 다가와주었다. 그녀는 중견 소설가 였고 광주에 한 대학에서 문학을 가르치는 교수이기도 했다. 안식년을 맞아 국내외 문학관을 오가던 희수 샘의 종착지가 토지문화관이었는데, 그녀는 외톨이처럼 집필실을 틀어박혀 시한부 작가 생활 중인 인경을 눈여겨본 것이었다. 첫 번째 함께한 산책길에서 희수 샘은 인경의 마음을 다독여주었다. 그녀는 이후로 희수 샘과 계속 산책을 다녔다. 입주 기간이 끝날 즈음엔,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단단한 동행을 얻었다고 느꼈다. " 고향에 가면 글쓰기 빼고 모든 걸 할 수 있을 거예요" 다음 날 희수 샘이 괜찮으면 고시원이 아닌 곳은 어떠냐고 물어봤다. 그녀의 대학생 딸이 방학에 내려오면 숙대 앞 전세빌라 가게에 있을 테니, 그 곳에서 글을 써보라는 제안이었다. 자기 공간을 공짜로 내어 주면서도 인경에게 부탁하듯 말하는 희수 샘의 배려에 그녀는 울 뻔했다. " 역시 쿨하시구나. 우리 엄마는 좀 깐깐한데... 배우 생활을 하셔서 그런가 작가 같지 않고 시원시원해 보이세요" " 배우는 은퇴 했어요. 깐깐한 작가 맞아요" 인경이 미간을 찌푸린고 고집스러운 인상을 지어 보이자 희수 샘의 딸은 우레와 같은 폭소를 터트려 주었다. 좋은 사람들이 좋은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구나. " 샘 덕분에 정말 잘 지냈어요. 그런데...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시는 거예요?" 쓸데없는 질문이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구차하게라도 마음을 표현해야 했다. " 밥 딜런 외할머니가 어린 밥 딜런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해요. 행복은 뭔가 얻으려고 가는 길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길 자체가 행복이라고. 그리고 네가 만나는 사람이 모두 힘든 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친절해야 한다고 " 인경은 집 안에 식량에는 손 대지 않기로 마음먹은 걸 떠올리며 서둘러 점퍼를 입고 빌라를 나섰다. 낮에 그 편의점으로 들어서는 그녀는 중저음에 인사를 들어야 했다. 연극판에 흔히 있는 덩치 큰 배역 담당 배우를 연상케하는 중년 사내가 계산대 있었다. 얼굴도 연기파에 가까웠다. 미모 보다는 연기로 승부해야 하는 인상이라는 뜻 이다. 아무튼 이 편의점 밤에 도둑 들어올 일은 없겠네, 생각하며 그녀는 진열대로 향했다. 편의점에 가기 위해 점퍼를 걸치며 존재 자체가 불편한 덩치 큰 사내를 떠올렸다. 잠시 다른 편의점을 찾을까 하던 그녀는, 지금이 추운 새벽 거리를 헤매는 것보다 집 앞 편의점에 불편함을 감수하는게 낫다는 결론을 내렸다. 편의점 안은 고요했다. 고장 난 전자레인지는 고쳐 놓은 건지 창가 구석에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상품 종류가 부실한 건 여전했다. 매출이 적은 편의점이니 상품을 다양하게 많이 들어 놓을 수 없었을 테고, 또 그러다 보니 손님이 줄어들 수밖에 없는 악순환에 빠진 곳임이 분명했다. 인경은 이곳이 자신의 처지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배 속이 쓰려 왔다. 인경은 자기도 모르게 탄성을 흘리며 자신이 노숙자였던 사내를 요리조리 뜯어 보았다. 그녀는 사내에게 과거 기억이 진짜 하나도 안 나냐며 재차 물었고, 사내는 여전히 날 듯 말 듯 잘 떠오르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인경은 대화를 많이 해야 기억이 활성화되니 앞으로 자신과 새벽마다 수다를 떨자 고 제안 했다. " 독고라고 해요. 이름도 몰라요 성도 몰라요" 인경은 참참참을 먹으며 흥얼거렸다. 뭔가 흥미진진한 캐릭터를 발견하자 술맛이 달게 느껴졌다. 참참참이란 야참 혹은 혼술 구성도 신선했다. 옥수수수염차는 좀 안 어울렸지만, 알콜성 치매로 괴로워하던 사내가 술을 끊기 위해 무언가를 마신다는 것은 의미가 있었다. 인경은 사내를 더 관찰하기로 마음 먹었다. 인경은 낮과 밤이 바뀐 싸이클을 계속 활용하기로 했다. 그녀는 새벽에 일어나 출근 하듯 편의점에가 산해진미 도시락을 먹으면 독고 씨와 이야기 나눴다. 생각보다 똑똑하고 눈치도 빠른 사람이었다. 며칠 같이 이야기를 나누던 인경은 이후로는 아예 수첩을 들고가 그와의 대화 꼭지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뜻하지 않는 취재는 그녀에게 글을 쓸 수 있을거라는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독고 씨는 알콜성 치매는 물론 정신적 트라우마로 과거의 기억 한 부분을 지운 것처럼 보였다. 작가가 되고 읽은 여러 심리학 서적에서 인경은 감정적 상처 에 대해 주목했다. 캐릭터는 결국 과거의 끔찍한 감정적 상처를 받은 경험이 있고, 그런 상황에서 무엇을 지키고자 했는 가가 그의 앞날이 된다. 독고 씨는 눈을 감았고 등을 돌렸다. 하지만 현재 그는 회복되고 있으며 사람들과의 소통을 통해 상처를 돌아볼 용기와 힘을 조금씩 채우고 있었다. 상처를 돌아보고 그것을 이겨내기 위한 노력 혹은 욕망이 그 사람의 원동력이 되고 캐릭터가 된다. 캐릭터를 보여 주려면 캐릭터가 선택의 갈림길에서 어떤 길로 가느냐를 보여 주면 된다. 독고 씨는 편의점 사장의 도움을 얻어 서울역에서 나왔고, 사회에 재진입해 자신의 트라우마를 증명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 믿음직한 거는... 나는 원래 이렇게 살지 않았어요. 나는 사람들과 별로 나눌 게 없었던 거 같아요. 이런 따뜻한 기억이 별로 없거든요" " 따뜻한 기억이라면... 뭘 말하는 거죠?" " 지금 아가씨 같은 사람과... 허물없이 대화를 나눈다거나 하는 거요. 편의점에서 접객을 하며... 사람들과 친해진 거 같아요. 진심 같은 거 없이 그냥 친절한 척만 해도 친절해지는 거 같아요" " 그 얘기 좋은데요? 내가 좀 써도 될까요?" " 이미 쓰고 있잖아요... 거기 수첩에. 마, 맞다. 연극 대본 쓴다고 했죠? 그럼 나도... 나오는 건가요?" " 어디에 쓰일진 모르겠어요. 그냥 스케치 같은 거니까... 분명한 건 아저씨가 저한테 큰 도움을 주고 있다는 거예요. 글쓰기를 거의 포기 하고 있었는데 덕분에 힘이 났거든요." " 도움이라니... 좋네요. 그런 의미에서... 사 가실 것 좀 없으세요?" " 아니 이 아저씨 과거에 장사 좀 하셨나 봐" 인경은 코웃음을 치고는 맥주 네 캔과 샌드위치를 가지고 왔다. 독고 씨는 금방 자동차라도 판 세일즈맨인양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취재원과 작가의 상부상조가 나쁘지 않았다. 셔터Q의 김 대표였다. 한때 인경을 먹여 살리다시피 한 최고의 조력자 였지만 지난 2년간은 문자 한 통 오가지 않은 관계. 받기를 주저하는 인경의 마음이 전화 진동처럼 떨리고 있었다. 곧 진동이 멈추고 나면 김대표와의 인연도 확실히 끝날 것이다. 그때 트라우마를 직면해야 한다 고 독고 씨를 다그치던 며칠 전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 인경 역시 자신을 돌아봐야 했다 . 그녀는 통화 버튼을 힘껏 눌렀다. 김 대표는 연말이라 그냥 생각이 났다며 잘 지내냐고 흔한 안부를 물었다. 2년쯤 지났으니 화가 좀 풀렸을거 같아 연락했다고 능글맞게 대답했다. 그가 그렇게 말해 주자 얼마 안 나는 앙금마저 행방이 묘연한 인경은 대표님이 안부만 부르려고 전화 하는 사람은 아니지 않냐며, 용건이 무엇인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김 대표는 성질 급한 건 여전하다고 한 마디 한 뒤 각색 제안이라고 말했다. 마지막 작업이 될 수도 있는데 각색을 하기는 싫었다. 인경이 미적대자 그가 채근했다. "오랜만에 연락해 제안하는거다... 너무 무 자르듯 굴면 서운한데" " 대표님. 사실 저 절필 할지도 모르거든요. 그래서 마지막은 오리지널로 가야 할 것 같아요." " 야, 정인경! 너 배우도 은퇴한다, 작가짓도 때려치운다... 너 진짜로 대학로 뜰 거야? 왜 맨날 마지막 타령이야" " 배우 은퇴는 대표님이 결정타 였거든요!" " 그러니까 작가 일 준다고 하잖아" " 다 끝났거든요! 쓰기만 하면 된다고요. 무대는 편의점이에요. 온갖 인상 군상이 드러나는 편의점. 주인공은 편의점을 밤에 지키는 정체를 알 수 없는 야간 알바. 이 야간알바는 중년 사내인데 자신의 과거를 몰라요. 알콜성 치매가 왔거든요. 손님들은 이 중년 사내의 정체를 자기네들끼리 추측하죠. 조폭, 전과자, 탈북자, 명퇴자, 심지어 외계인! 그런데 이 사내는 아랑곳 없이 손님들에게 낯선 상품을 추천하고... 신기하게도 사람들이 산에가 추천하는 상품을 사고 나면 고민이 해결되는 거예요" " 정 작가. 그거 하자, 나랑" " 정말요? 아직 쓰지도 않았는데요" " 다 썼네, 머릿속에서. 그거 내년에 올리자. 장담하는데 그거 너 마지막 작품 아니야. 그 작품 올리면 다음 것도 쓸 수 있게 될 거야 " " ...진짜 그렇게 생각해요? 나 진짜 벼랑 끝인데... 대표님이 너무 쉽게 오케이 해서 이상 하거든요. 나 아직 이거 쓰지도 않았단 말이에요" " 내일 제목만 써서 가져와. 원래 계약서 써야 원고도 써지는 거야" " 김 대표님... 고마워요, 진심" " 나 바보 아니다. 아이템 괜찮아. 너 목소리에서 간절함도 느껴지고... 잘 쓸 거 같아" " 나 원래 잘 썼습니다" " 칭찬 하기가 무섭구나, 참 제목은 뭐야?" " 음... 편의점 인데요, 아주 불편한... 그래서... 불편한 편의점" 김 대표의 전화를 끊자마자 인경은 노트북 한글 프로그램을 열었다. 그러고는 빠르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그녀의 마지막 작품이 될지도 모를 새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그녀는 쉬지않고 타이핑을 했다. 어떤 글쓰기는 타이핑에 지나지 않는다. 당신이 오랜 시간 궁리하고 고민해 왔다면, 그것에 대해 툭 건드리기만 해도 튀어나올만큼 생각에 덩어리를 키웠다면, 이제 할 일은 타자 수가 되어 열심히 자판을 누르는게 작가의 남은 본분이다. 생각의 속도를 손가락이 따라가지 못할 정도가 되면 당신은 잘하고 있는 것이다. 인경은 연기하듯 대사를 발음하며 동시에 타이핑을 했다. 그녀의 왼손과 오른손이 서로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그녀는 그 동안 봉인 됐던 필력이 풀린 듯 쉼 없이 이야기를 써내려갔다. 저녁에 시작된 작업은 어느덧 자정을 넘겼고, 겨울 밤 하늘에 어둠이 짙어질수록 그녀의 그래도 밀도를 더해 갔다. 그 새벽, 동네에 유일하게 불이 켜진 곳은 독고 씨의 편의점과 그녀의 작업실 뿐이었다. / 내 생각: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이 말한다. 왜 나에게 잘해 주냐고. 진짜 궁금해서 묻는 경우도 있고, 확인 받고 싶어서 의심이 되어 보는 경우도 있다. 인간의 삶은 한 치 앞도 볼 수가 없어서 모두가 그 불확실성 속에 불안할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서로를 믿고 의지하면 살아가는게 아닐까? 다들 큰 뜻을 갖지않고 일을 시작했다. 새로운 장소에서 새로운 일이 펼쳐졌다. 누군가는 쉽게 보고 천하게 볼 일도 주인공 독고 씨는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의 가장 큰 업적은 들어 준 것 이라고 생각한다. 모두가 말하고 싶어 하지 들어 주지는 않는다. 그러면서 서로를 이해 못 하겠다고 한다. 들어야 이해도 가고 서로를 알아가는 건데. 독고 씨는 무작정 들어주기 보다는 바른 말도 같이 해 준다. 독고 씨처럼 진지하게 얘길 듣고 깊이 공감한 뒤 해준 조언은, 속마음을 털어 낸 사람으로서 무시할 수 없어진다. 아무리 사람을 바꿀 수 없다 하지만 독고 씨는 그 절차을 알고 있는 것 같다. 가만 독고 씨를 위해서 바꾸는게 아니라 상대방이 진정 행복하기 위해서 바꿔주는 느낌이다. 잊고있던 자신이 원하는 것을 깨닫게 해주고 어떻게 해야 되는지 알려 주는 느낌 이다. 나도 독고 씨에게 모두 털어놓고, 내가 진정 바라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위해 살고 싶다. 독고 씨와 같은 사람이 곁에 있으면 정말 행운이다 /

네 캔에 만 원

민식은 자신의 불운에 대해 생각했다. 언제부터 불운이 그의 삶에 멱살잡이를 해 왔는지 되짚어보았다. 아마도 초등학교 시절 야구부에 들어가지 못 하는게 그 시작이 아니었을까? 그저 공부의 길로만 몰아갔던 부모님이 결정이 첫 번째 불운이었다. 사람마다 재능이 다르고 관심이 다를진데 부모님은 왜 그가 좋아하는 것보다 공부를 잘 해 평범한 성인 이 되는 것만을 강조 했던 것일까? 바로 그것이 자신들의 삶이었고, 공부 잘 하는 누나의 모습이었으며, 아들이자 막내인 민식 역시 따라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 내 생각: 부모가 아들에게 예체능이 아닌 평범한 길을 걸으라고 한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을 것이다. 첫 번째 예체능은 돈 이 많이 든다. 부모로서 부담이 될 수 밖에 없다. 마치 미래를 알 수 없는데 돈을 넣어야 한다는 막막함이랄까. 그래서 그나마 안정적인 평범한 길을 추천하게 되는 것이다. 공부를 못 해도 크게 지장이 가진 않으니까. 반대로 민식이가 부모가 되었을 때 자식이 예체능을 한다고 하면 본인은 그 금액을 감당할 수 있냐고 묻고 싶다ㅋㅋ 두 번째 운동은 성공하기가 쉽지 않다. 공부 경쟁률 보다 운동 경쟁률이 더 높다. 스타성까지 갖춰야 하기에 부모로서 불안정하다고 볼 수밖에 없다. 겉멋이 들수도있고 헛물을 킬 수도 있다. 부모가 자식의 미래를 걱정하는 건 당연하고, 당연히 잘 될 가능성이 높은데 배팅 할 수밖에 없다. 운동보다는 공부를 추천한 건데, 자신이 업신여기는 공부도 제대로 못 하면서 운동을 못 하게 했다며 부모를 탓하는 모습이 답답 하다; / 공무원과 교직이라는 안정적인 인생을 살아 온 부모님이나 세상 부러워하는 전문직 종사자인 누나와 달리 민식의 세상은 정글 이었고 맨몸으로 싸워나가야 했다. 머리도 특출나지 않고 학벌도 별로였지만 건강한 몸과 말빨로 무장한채 그는 돈이 되는 일은 어떤 경우에라도 하기로 했다. 가족에게 인정받을 수 있는 유일한 가치도 돈이고 그에게 필요한 것도 돈 뿐 이었다. 나머지는 모두 따라오는 것일뿐, 돈만이 그를 그답게 만드는 것이었다. 민식은 돈을 벌기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그렇게 하게 된 일들은 합법과 불법을 경계를 교묘히 오가는 일 들이었다. 후회는 없었다. 그런 일들을 하며 돈을 꽤 벌었고 서른이 되기전에 본인 명의 아파트를 샀고, 외제차를 끌 수 있게 되었다. 돈을 많이 벌자 부모님도, 누나도, 그 잘난 매형도 더 이상 민식한테 함부로 충고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게 좋았다. 민식이 가진 돈의 위력은 잘난 그들도 주눅들게 만들었다. 여기서 조금만 더 벌면 가족들이 굽실 되는 것도 볼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매형과 누나는 자신들이 차릴 병원에 투자를 부탁하며 팔자에 없는 아부를 떨게 분명했다. 고지가 코앞이었다. 조금만 더 벌어 왕처럼 굴려던 목표는 사업을 무리하게 키우게했고 곧 댓가를 치르게 했다. 재기를 노리고 벌인 새 사업장에서 만난 전처는 민식 못지 않은 '업자'였다. 사람들에게 쉽게 현혹 되지 않는다고 여겼는데 그 여자에게만은 너무도 쉽게 빠지고 만 나머지 6개월 만에 모든 것을 쏟아 붓고 말았다. 미친 김에 결혼했고, 2년간 서로 협잡을 벌이다 유일하게 남은 재산인 아파트까지 넘겨 주고서야 관계가 정리됐다. 그로부터 1시간 동안 민식은 엄마와 맥주를 마셨다. 엄마 마주 앉아 대작을 한 건 그의 생애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엄마가 술을 마신다는 것도 낯설었고 둘만의 대화가 지속된다는 것도 신기했다. 지난 몇 년간 민식은 엄마에게 늘 무언가를 요구했고, 엄마는 그것이 무엇이든 거부했으며, 대화는 더 이상 지속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민식은 엄마와 적당히 취해 온갖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엄마는 수다가 고팠던 듯 방언 터진 사람처럼 아들에게 털어놓았고, 민식은 또 민식 대로 주변 사람들에 대한 엄마의 생각을 듣게 돼서 기분이 새로웠다. " 술을 마시는게 문제가 아니라 술 마시고 실수 하는게 문제인 거지" " 그러니까, 술 먹으면 실수를 하게 되죠. 아무래도" " 엄마는 안 그래. 술이 세거든. 동료 남 선생들이 그렇게 술을 먹이려고 하더라. 근데 난 잘 안 취해. 다만 맛이 없어서 못 먹겠더라고. 소주는 쓰기만 하고 맥주는 닝닝하고 포도주는 너무 달고... 근데 이 맥주는 아주 좋더라" 순간 민식의 눈빛이 번뜩였다. 상대를 꼬실 수 있는 합당한 타이밍. 그는 지금이 바로 엄마에게 양조장 사업에 대해 털어놔야 할 때라 느꼈다. 그런데 술이 없다. 그는 휴대폰을 들고 엄마 옆으로가 앉았다. 편의점에 득달같이 달려온 민식은 냉장고로 향했다. 독고 씨는 컵라면을 창가 테이블에 내려놓고 자신을 향해 다가왔다. 민식아 휴대폰을 꺼냈다. 자신을 사기꾼 보듯 살피며 다가오는 놈을 향해 휴대폰 속 사진을 들이밀었다. " 증명했지? 됐냐?" 5분 전 엄마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놈은 한동안 바라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회심의 미소를 짓고 나가던 민식이 순간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이거 오늘 얼마나 나갔지?" " 오늘... 처음이야. 사장님한테... 발주 그만 넣으시라... 하려고. 장사는... 내가 좋아하는 거... 파는게 아니야. 남이 좋아하는 거... 파는 거지 " "남들도 좋아한다니까?" "매출은... 거짓말을 안 해" "흥. 두고 보시지" 민식은 콧김을 뿜고는 편의점 문을 세게 밀고 나갔다. 집에 돌아와 보니 엄마는 식탁에 발그레한 얼굴을 묻고 오는 낫게 코를 골며 잠들어 있었다. 한동안 민식은 잠든 엄마의 모습을,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더 많은 조그마한 여인을 말없이 내려다 보았다. 엄마를 들어 안방으로 향했다. 엄마의 몸은 가볍고 아들의 마음은 무거웠다. 좋은 밤이었다. 오늘은 엄마가 건배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사진도 같이 찍었다. 오랜만에 느낀 가족의 온기였고 그걸로 충분했다. 독곤지 독건지 하는 놈의 정체를 알 수 없으니 조사가 필요하다. 무엇보다 매출은 거짓말을 안 한다며 에일 맥주에 부정적인 놈을 그냥 둘 수는 없다. 발주니 뭐니 쓸데없는 말을 떠들어댔다가는 엄마를 설득하기가 더욱 힘들어 질 것이다. 그러니 서둘러야했다.

폐기 상품이지만 아직 괜찮아

50대 초반의 사내가 코트 차림으로 나오다가 그를 매섭게 훑는 것이 아닌가? 곧바로 데스크 직원은 선생님에게 고자질 하듯 그에게 경찰이 왔다고 말하며 그를 가르켰다. 키도 크고 머리도 큰 원장이 곽을 위아래로 기분 나쁘게 살피고는 대뜸 따라오라며 원장실로 향했다. "용산서 지능범죄팀엔 그런 사람 없다는데요? 지능범죄는 그쪽이 저지르고 계신 거 아닌가?" 조사를 하려다 순식간에 주도권 을 빼앗기고 오히려 조사를 당하고 있다. 이제는 알아서 기라는 듯 내리 깔아보는 원장의 모습에 곽은 가까스로 기운을 냈다. 자신의 나이 정도 되면 자연스럽게 장착하게 되는 뻔뻔함을 발휘하기로 한 것이다. "전직 경찰입니다. 내 간절한 일이 있어 거짓부렁을 좀 했는데 이해 바랍니다" "얼마나 간절한지 모르겠지만 당신 지금 경찰 사칭 하다걸린거야. 어쨌거나 간절하게 해명 해보시지" 원장은 거짓말 탐지기라도 탑재한 듯 고개를 까딱이며 곽의 말을 저울질 했다. "상담 환자들이 말을 번복 하는 경우가 있어서 말이야, 이 방은 모든게 녹음되고 녹화되고 있어. 당신이 경찰 사칭한 증거는 이미 확보됐다는 거지. 그러니까 거짓말 꼬리 그만 물고 정직하게 말하지 그래 마지막 기회야" 원장은 곽의 정체와 거짓말이 탄로 나자 반말을 지껄이며 잡아먹을듯 굴었다. 뱀 앞의 개구리 꼴이 된 곽은 빠른 투항만이 답이라는 걸 깨달았고, 자신은 좋은사람들 흥신소 운영하고 있으며 아까 그 사내에 대해 조사하는 중이란 사실을 밝혔다. "편의점에서 밤새 야간 알바라... 웃기긴 한데 처리하기 불편하네. 놈이 어디사는지 알아봐 주로 가는 곳과 혼자 있는 곳도. 알아내면 내 사례 하지" "사례라면 어떤 사례를 말씀하시는지...." " 당신 죄를 안 묻는 거지. 사흘 안에 전화 해. 잠수타면 곤란할 거야. 그 자식 처리할 때 당신도 가만 안 둘 수 있어" " 나? 입 닥치고 조용한 편이다. 잘 들어 이놈아. 우리 같이 돈도 힘도 없는 노인들은 발언권이 없는 거야. 성공이 왜 좋은 줄 아나? 발언권을 가지는 거라고. 성공한 노인들 봐. 일흔이 넘어도 정치하고, 경영하고. 떠들어도 밑에 젊은 놈들이 경청 한다고. 걔들 자식들도 충성하고. 근데 우린 아니야. 우린 망했잖아. 근데 떠들긴 뭘 떠들어!" 운동을 하는 딸에 이어 아들까지 예술고에 가겠다고 하자 목돈이 필요했다. 때마침 들어온 유혹은. 적절해 보였다. 그는 사례금으로 치장된 무마 대금을 받아들였고 그것으로 아들의 악기를 사 주고 레슨비를 감당했다. 대가는 참혹했다. 가족을 위한 뇌물 수수 했지만 결국 직업을 잃었고 불명예스러운 삶을 맞이하게 되었다. 좋은사람들 흥신소 차리고 불법과 합법의 경계를 오가며 일하게 되자 아내는 물론 아이들까지도 아빠를 불편해하고 거리를 두는게 느껴졌다. 젠장, 누군 하고 싶어서 이 일을 하나? 돈을 벌어야 했기에 감당했을 따름이다. 그래도 거친 일을 하며 수모를 겪으면서도 수완을 발휘해 생계를 꾸렸고 자식들을 대학까지 졸업시키고야 말았다. 하지만 이제 그의 능력은 퇴회되었다. 진짜 탐정이라 불리는 민간 조사원들을 재간이 없었다. 돈을 벌어 오지 못하자 가장의 권위는 땅에 떨어졌다. 결국 아내는 이혼을 요구했다. 아이들은 사회인이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독립을 했고, 잊을만 할 때 전화나 한 통 하는게 다였다. 억울할 건 없다. 당시엔 전혀 이해하지 못 했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납득하게 되었다. 돈만 벌어다 줄 알았지 요리라곤 라면 밖에 못 끓였고 세탁기 돌릴 줄 몰랐다. 자식들과 대화하는 것도 너무나 어색하고 힘이 들었다. 아내야 말할 것도 없었다. 손찌검만 안 했지 수시로 고함을 치고 윽박지르기 일쑤였다. 아이들 역시 그것을 보고 자라지 않았겠는가? 결국 고립은 스스로 만든 것이었다. 대화를 나눌 가족이 사라졌고 그것이 스스로의 탓임을 깨닫게 된 곽은, 그제야 자신의 입을 가리고 있는 마스크가 편하게 느껴졌다. 진즉에 봉했어야 했다. 가족들에게 무심코 던졌던 폭력적인 말들이 고스란히 자신의 뒤통수에서 울릴 때마다 자업자득이란 말을 되새김질할 수 밖에 없었다. 곽은 자기도 모르게 말꼬리를 흘리게 되었다. 아까 본 강의 어머니의 기품 있는 모습이나 지금 눈앞에 타깃의 단호함에서 흔들리지 않는 진실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40년 넘게 좋은사람들 흥신소 일을 하며 거짓부렁을 늘어놓는 경우를 수없이 보아왔기에, 어떤 진실된 면모는 접하자마자 알 수 있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곽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옅게 미소를 머금었다. 의심이 되는 상황이었다. 절대 접촉해서는 안될 타깃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오히려 그로부터 일감 해결의 팁을 얻었다. 자기도 모르게 타깃의 앞날을 신경 쓰게 됐고, 답을 듣고는 되레 안도감을 느끼고 있었다. 뭐지? 무엇보다 이곳의 따뜻한 온기가 좋았다. 옆구리를 간질이는 온풍기의 열기도, 앞에 마주 앉아 바람을 막아주는 큰 덩치의 사내도, 직원들 생계를 위해 돈 안내는 가게를 접지 않는다는 사장이 있는 편의점도. /내 생각: 제목을 다시 생각해 봤다. [폐기 상품이지만 괜찮아] 이번 글의 주인공인 곽씨를 의미하는 듯했다. 현재의 곽씨는 전성기 때를 보지 못 할 정도로, 나이 들었고 가족을 잃었다. 모두가 그는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판단할 때, 그는 일을 찾고 했다. 젊고 일 잘하는 사람들이 넘치기에, 냉정하게 보면 그는 폐기 상품과 다를 바 없을 수 있다. 허나 독고 씨가 직전에 폐기된 핫바를 데워 와서 이상이 없다며 맛있게 먹었던 것처럼, 곽씨가 더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그의 선택에 달렸다. 판단하기 나름이라는 뜻이다. 나는 그의 선택을 응원하고 싶다/

ALWAYS

고통의 기억을 잊으려 허기조차 잊고 술로 뇌를 씻어보려 하지만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기억을 휘발 시켜버리고 이제 내가 누구라고조차 말할 수 없는 지경 이 되어 버린다. 노인을 만난 건 그즈음이었다. 마지막 안 간 힘으로 서울역에 왔지만 서울역 밖으로 한 발짝도 떼지 못하고 두려움에 떨며 주저앉은 그때, 한 노인이 날 보살펴 주었다. 이름을 물어도 답하지 못하고 기억을 물으면 두통을 일으키며 괴로워하던 내게, 쓰레기통과 역 앞 급식소만을 오가던 내게, 노인은 종로의 무료급식소와 을지로 지하도에 아지트를 알려주었고 노숙인 보호시설을 치고 빠지며 이용하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노숙자 선배 노인의 도움이 없었다면 나는 이미 죽었을 것이다. 노인과 함께 술을 많이 마셨다. 노숙인은 구걸을 해선 안 된다면서도 술이 떨어지면 어떻게든 돈을 빌어 소주를 샀다. 그리고 그 귀한 술을 나와 나눠 먹으면서도 아까워하지 않았다. 서울역에 주된 노숙자 무리에서 밀려나 구박을 받던 노인은 어쩌면 덩치 큰 보디가드가 필요 없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소문처럼 IMF 때 망한 대기업 전무 출신이라 비서가 필요 했는지도. 우리는 주로 서울 역사 내 TV를 보며 정치 사회 경제 역사 연예 스포츠를 논했다. 24시간 뉴스 채널에 나오는 온갖 사건 사고에 댓글을 달 듯 허튼 소리를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와 그렇게 1년 남짓 세상사를 떠들다보니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노인과 내가 유일하게 나누지 못한 것은 서로의 과거 이야기. 그것은 알지도 못하고 알아도 나눌 수 없는 불문율처럼 그와 나 사이의 봉인된 채도 놓여있었다. 서울역에 자리한 지 2년쯤, 노인을 안지는 1년 6개월이 되던 어느 날, 그는 내 옆에서 웅크린 채 죽어 갔다. 나는 그의 죽음 옆에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죽어가는 것을 느끼면서도 등을 기댄 채 내 몸의 온기를 나눠줄 뿐이었다. 전날 그의 유언 같은 한 마디를 되내며. 독고. 노인은 자신을 독고라고 밝히며 기억해 달라고 했다. 그는 그게 성인지 이름인지 덧붙이기 없었고 나 역시 물어볼 의욕이 없었다. 다음 날 아침, 독고는 죽었고 나는 그를 기억하기 위해 독고가 되었다. 나는 독고라는 이름을 얻은 값을 하려는 듯 혼자 다녔고 외로움을 베개 삼았으며 두 명까지 힘껏 패주고 다녔다. 세 명 이상에게 다구리를 당할 때는 흠씬 맞고 치료소를 찾아 가는 수밖에 없었고, 종종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고 오줌이 나오지 않았으며, 얼굴이 호빵처럼 부었지만 죽어가는 방법이라 생각하니 딱히 고통스럽지 않았다. 혼자 하루를 보내다 보니 말하는 것도 잊으면서 자연스레 말을 더듬게 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게 동정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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